실존적 공허와 불안의 미학 - 『말테의 수기』와 도시 속 고독의 심리학
고려대학교 환경생태학부의 강병화 교수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는 잡초였을 겁니다.”
나에게는 별다른 재능도 없고 특별한 인연 같은 건 있지도 않아, 라고 푸념하게 되는 날들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특별함’이라는 기준에 맞지 않는 평범함은 잡초처럼 베어내고 세상이 꽃이라 부르는 것들만 기르고 싶은 마음에서 나오는 푸념이 아니었을까.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에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영웅이란 게 어떤 것인지 잘은 모른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한단다. 영웅이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저에게 영웅에 대한 생각의 전환점을 준 책이 바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입니다.
우리는 문학이란 특별하거나 비범한 삶의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극적인 사건과 거대한 전환점, 영웅적인 순간이 없으면 충분히 문학적이지 않다고 느끼기 쉽습니다. 그러나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조용히 허물고, 평범하고 소박한 삶이야말로 가장 깊은 문학성을 품을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윌리엄 스토너의 삶은 겉보기에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시작해 조용한 조교수로 생을 마감하는 그의 인생에는 화려한 성공도, 극적인 실패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삶 속에 복잡한 감정, 선택의 무게, 관계의 균열과 회복이 깊게 녹아 있습니다. 따라서 스토너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평범한 삶 역시 얼마나 문학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문학은 스토너에게 단순한 전공이 아닌, 삶의 중심이자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가정에서의 소외, 학문적 갈등, 인간관계의 실패 속에서도 그는 책과 글쓰기에서 위안을 찾습니다. 문학은 그에게 ‘도피’가 아니라 ‘지탱’의 수단이며, 삶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언어였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당신은 어떤 문학적 순간을 발견하셨나요?
스토너에게 문학은 가장 섬세한 위안이었습니다. 작품에서 특별히 인상 깊은 장면 하나는 스토너가 힘겨운 결혼 생활과 외로움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읽는 순간입니다. 그는 복잡하고 불안한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문학 속에서 위로와 이해를 경험합니다. 작품 속 스토너는 셰익스피어의 언어를 통해 자기 내면의 고통과 고독을 비추고, 마침내 그것을 받아들이고 견딜 힘을 얻습니다.
또 다른 문학적인 순간은 학내 정치 갈등과 학문의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스토너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문학 작품을 논의하는 장면입니다. 스토너는 학생들과 함께 문학적 작품을 탐구하는 시간 동안, 권력 관계와 현실의 무게에서 잠시 벗어나 순수하게 인간과 세상에 대해 성찰합니다. 이때 그에게 문학은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삶의 진실을 더욱 깊이 들여다보게 만드는 창구로 작용합니다.
스토너처럼 삶의 어려운 순간에 당신을 지탱해준 문학적 작품이 있었나요?
스토너는 학문적 이상을 품고 교수의 길에 들어서지만, 학계라는 세계도 결코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내부 정치, 권력 관계, 인간적 질투가 얽히고설켜 그는 늘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이 지점은 지식의 세계조차 권력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안에서도 ‘자기다움’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드러냅니다.
스토너는 외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세상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소극적이고 조용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의 안에는 꺾이지 않는 회복력과 깊고 진실한 성찰이 있습니다. 삶이 끊임없이 부딪히고 상처를 남겨도, 그는 문학과 내면의 중심을 지키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 ‘고요한 저항’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요란하지 않아도, 굳건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자기 삶을 견고히 살아가는 인물이 바로 로맹 롤랑이 말한 영웅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고요히 저항하며 견뎌낸 순간은 언제였나요?
스토너는 아내 이디스와의 결혼, 딸 그레이스와의 관계, 그리고 캐서린과의 짧은 연애를 통해 ‘사랑’이라는 감정의 복잡함과 모순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들 관계에는 공통적으로 ‘침묵’과 ‘단절’이 흐르는데 그것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본질적인 고독의 반영이며, 감정의 소통이 얼마나 어려운지, 때론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걸 말해줄 수 있다는 걸 이 소설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진심이 항상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는 현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관계를 유지해가는 인간의 고투가 담겨 있기 때문이죠.
침묵 속에서도 진심이 전달되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나요?
스토너의 삶에서 문학은 피난처이자 구원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불행한 결혼 생활의 외로움 속에서 셰익스피어의 시를 읽으며 위안을 얻고, 학문적 갈등 속에서도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문학적 대화를 통해 삶의 균형을 유지합니다. 그에게 문학이 없었다면, 일상의 고독과 학계의 냉정한 현실, 관계의 복잡한 고통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토너는 도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문학을 통해 삶의 진실과 정직하게 마주하며, 그 안에서 조용한 저항과 내적 회복력을 발견합니다.
이 작품이 나에게 깊은 울림을 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위대한 서사는 반드시 웅장하거나 비범한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조용한 순간들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삶을 견디고 의미를 발견하는 방식에 있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스토너가 우리에게 남기는 메시지 또한 명확합니다. 평범한 삶을 살더라도, 그것이 진실하고 정직한 삶이라면 이미 충분히 문학적이라는 것입니다.
<스토너>는 문학 그 자체에 대한 예찬이자, 인간의 조용한 고투에 대한 송가입니다. 이 작품은 화려하거나 극적인 사건 없이도,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이 그 자체로 ‘문학’이 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스토너>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삶과 학문, 사랑과 고독,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용기를 주는 조용한 스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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